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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화재에 사용된 도료인 ‘명유’, 문헌고증 통해 완벽하게 복원

시간:2024-03-28 17:01:36 출처:网络整理编辑:지식

핵심 힌트

바른지 12시간 만에 말라 이물질 안붙고 수명 크게 늘려100년 만에 규명... ‘맥’ 끊어진 명유의 상품화 가능성 높여목조문화재 건조물 보존을 위해서는 목재 부위에 유성도료 도포

조선시대 문화재에 사용된 도료인 ‘명유’, 문헌고증 통해 완벽하게 복원

바른지 12시간 만에 말라 이물질 안붙고 수명 크게 늘려
100년 만에 규명... ‘맥’ 끊어진 명유의 상품화 가능성 높여
목조문화재 건조물 보존을 위해서는 목재 부위에 유성도료 도포가 필수적이다. 조선시대에는 유성도료인 명유의 주기적인 도포가 이뤄졌다. 의궤 등 조선시대 문헌을 바탕으로 명유를 제작해 바르면, 그 재료인 일반 들기름에 비해 건조속도가 60~300배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전통 방식으로 만든 명유.


조선시대 500여년 내내 사용되다가 사라진 ‘명유’(明油)가 문헌고증을 통해 전통방식으로 복원되었다. ‘잊혀진 도료’ 명유가 되살아난 것이다. 복원된 명유는 바른지 12시간 만에 건조하는 성능을 보여 목조 문화재 보호에 획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같은 사실은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협동과정 장영주 박사의 ‘조선시대 천연 유성도료 명유의 전통과 재현’이라는 논문에서 밝혀졌다. 명유가 사라진 이후 그 실체를 사실상 100년 만에 다시 밝혀낸 셈이다.

장 박사가 제작된 명유를 목재에 바르는 모습. 앞쪽에는 밀타승 황단 군청 석황 주사 전통연백 린시드오일 등과 명유가 보인다.


명유 건조시간, 원료 들기름에 비해 60~300배 빨라

명유는 4000여권에 달하는 조선왕조의궤의 거의 모든 책에서 언급됐을 정도로 조선조 내내 목조건축물과 가구에 널리 사용되어 왔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승이 끊어져 현재는 그 흔적마저 찾기 힘들다.
들기름으로 만든 명유는 비나 습기 등의 침투를 막아 목조문화재 등을 오래도록 보존 유지하는데 사용됐다. 조선 왕실의 흔적이 배어있는 경복궁, 종묘 등 모든 건물에 칠해져 일종의 ‘니스’ 역할을 한 셈이다.
현재 목조문화재에는 도료로 들기름을 바르도록 문화재수리시방서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들기름의 경우 무려 6개월이 지나야 건조하는 경우도 많아 실제 사용은 제한되어 있었다. 건조되는 과정에 먼지와 오물이 달라붙어 건물 자체를 지저분하게 하거나 건조되지 않고 산패해 나쁜 냄새를 풍기는 상황도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동안 문화재수리 현장에서는 수리지침을 따르지 않고 기둥이나 단청에 들기름조차 칠하지 않고 아무런 방수용 도료처치를 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전통 명유 제조에 들어가는 재료들. 왼쪽부터 백반, 황단, 무명석. 황단과 무명석은 중국 베이징 약재시장에서 구입해 사용했다.


장 박사는 명유를 통해 전통문화재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맥’이 끊어진 명유의 상품화 가능성도 높혔다. 그는 “현재 목조건축물에 조선 500여년 동안 지속되던 방수도료 도포가 중단된 지 오래고 단청과 같은 수성도료로만 최종 마감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고 밝히고 “문제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목재가 습기를 흡수해 썩는 속도가 빨라져 결국 문화재 수명은 급속히 단축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928년 순종 신주를 종묘로 옮길 당시 신주가마 착칠이 마지막

실제로 서울시내 고궁을 돌아보면 그 양상은 휠씬 더 심각하다. 종묘나 경복궁 등에는 빗물이 침투해 기둥이나 목재가 부식되고 있는 모습이 흔하고 심지어 기둥을 잘라내고 그 공간에 전혀 다른 나무로 채워넣은 장면도 목격된다. 복원된 종묘의 담장 서까래는 곳곳에 나무가 부식된 곳이 보이고 일부 경복궁 담장의 경우 아예 시멘트 서까래로 채워놓은 모습도 발견된다. 전통과 영혼을 잃은 경복궁 담벼락 모습은 거의 흉물에 가깝다.

장 박사는 “조선왕조의궤에 의하면 명유제작에 소요된 물품은 들기름을 비롯해 무명석, 황단, 백반 등인데 그 구체적인 사용량이 남아있기에 복원이 어렵지만은 않다”며 “다만 명유의 제조법이 의궤에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아 이를 인접기술에서 원용하거나 시행착오를 거쳐 복원할 수밖에 없다”고 그 한계를 밝혔다.
조선조 내내 사용되던 명유는 1926년 순종 장례식에 이어 2년 뒤 순종 신주를 종묘로 옮길 때 신주가마 등 착칠에 사용된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용된 흔적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류성룡 고려대 교수(건축학과·문화유산협동과정)는 “명유는 가칠로도 불리웠는데 임시 또는 가짜라는 뜻 때문이었는지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며 “이제 그 가치를 재평가 받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기후변화로 인한 목재 피해를 막는데 전통의 방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고풍이라는 미명 아래 방치하고 있는 수많은 목재 문화재들의 운명이 제대로 고증된 명유와 가칠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명유를 유리판 위에 떨어뜨린 뒤 마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은 표면이 내부보다 먼저 말라 주름이 진 상태.


문화재에 들기름 바르면... 마르는 6개월 동안 먼지와 벌레 투성이

다음은 장박사와의 일문일답
-명유란 무엇인가
“명유는 주로 왕실과 관련한 목재가구와 건축물에서 사용하던 코팅재료로 나무에 물 침투를 막아주는 ‘조선시대 니스’라 할 수 있다. 들기름에 건조촉진제를 넣고 끓여서 천연니스를 만든 것이다. 명유에 관한 연구는 최근 10년 내 몇 건 있었고 실제로 복원시도를 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는 못냈다. 들기름을 도료로 만들었을 경우 중요한 문제가 ‘건조 시간’이다. 마르는 시간이 한달 이상 걸릴 경우 주변의 먼지와 오물이 달라붙어 건물 자체를 지저분하게 만든다”

-명유를 왜 사용해야 하나
“목재의 경우 공기 중 습도에 따라 반복적인 수축과 팽창을 한다. 명유는 강도 높은 피막이 아닌 신축성 있는 도막을 만들어 다소 낮은 등급의 도료인 것 같이 보이지만, 일단 목재에 바르게 되면 나무와 함께 수축 팽창한다. 이런 성질때문에 도막이 갈라지거나 들떠 일어나지 않는다. 명유는 이런 고유의 탄력성 때문에 조선왕조 내내 사용돼 온 것으로 보인다”

-문화유산보존 측면에서의 의의는
“반복적인 제조실험 결과 12시간 만에 건조하는 명유를 만들었다. 건물이나 가구의 손상위험을 없애고 획기적인 시간 단축으로 오물이 달라붙는 여지도 없앴다. 이러한 건조 시간은 서구의 천연 식물성 도료보다도 더 빠른 것으로 조선시대 명유의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재료인 들기름이 서양의 식물성 도료의 재료인 아마씨 기름보다 건조 특성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들기름을 원료로 한 명유는 원료 들기름의 건조시간에 비해 60~300배 빨리 마르는 속건성을 가지게 된다”

5년째 보수정비공사가 진행 중인 서울 종묘 ‘정전’의 모습. 올 1월 문화재해설사가 관람객을 대상으로 정전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동안 연구가 없었나
“명유 연구는 2010년쯤 시작돼 최근까지 극소수의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복원시도를 했지만 조선시대 사용된 제조방식을 제대로 찾지 못해 만족할 만한 도료를 만들지 못했다. 더욱이 전통방식이 아닌 진공상태에서 단순히 온도를 높여 끓이는 방식을 취해 건조시간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의궤를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전승이 안 됐나
“서양식 니스와 페인트가 수입되면서 잊혀졌다. 목조 건축물에 바른 니스와 페인트는 처음에는 단단하고 보기 좋지만 시간이 지나면 습기에 의해 도막이 갈라지고 일어나게 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 급기야 니스칠마저도 생략됐다. 이 때문에 고건축물에 빗물이 바로 젖어들게 되는 상황이 일제강점기 이후 100년 이상 지속돼 온 셈이다. 이는 일본에서도 그대로 빚어진 현상이다. 일본 역시 전통유칠이 사라지고 니스와 페인트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가 다시 전통 유칠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경복궁 종묘 등 기둥에 일종의 니스 역할

명유가 복원되지 않아 문화재 공사현장에서 실무자들이 많은 고충을 겪어왔다. 경복궁과 숭례문 복원을 지휘했던 신응수 도편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89년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한옥(심원정사) 건축공사가 끝나고 마감 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들기름칠을 놓고 신응수 도편수가 문화재 당국의 지시에 이견을 보였다.

“칠을 해야겠는데 어떤 칠을 해야하나, 새로운 숙제가 또 주어졌다. ‘들기름 칠을 하되 니스는 칠해서는 안 됨’이란 문화재관리국의 허가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도편수 신씨에게 물었다. 신씨는 “들기름을 칠하면 나무가 새까많게 변하고 끈끈해서 먼지가 잘 타는 흠이 있다”(출처: 어머니가 지은 한옥, 윤용숙 저)

건축 총책임자인 도편수가 현행 규정인 들기름칠에 반대한 셈이다. 이는 경복궁 복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복궁에는 수성단청칠 이후 아무런 유성도료가 칠해지지 않았다. 안동 하회마을 한옥에서는 결국 수입도료가 발라지고 말았다. 이후 숭례문 복원작업에서도 수입도료가 사용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측면 기둥 하부의 상황. 빗물이 스며들어 칠이 벗겨지고 나무 표면 부식이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용희 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은 “의궤나 실록의 기록을 보면 명유는 특히 궁궐건축에서 비바람에 노출되는 기둥 등 목부재의 단청 퇴락을 방지하기 위한 내수성 도료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장박사의 이번 연구는 명유의 제조방법과 그 적용기술을 재현한 것으로, 사라진 우리의 전통기술의 복원뿐 아니라 목조건축물의 보존제로서 또 단청 시공 시 사용되는 합성수지 도료의 대안 중 하나로 명유가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삼대자 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도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4월 23일 ‘궁궐의 도색을 다시 하는데 쓴 명유가 400말이었다’는 기록은 일찍이 목조건물에 명유가 사용됐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말했다.

KBS PD출신인 장 박사는 역사스페셜 PD(책임PD 포함)로만 15년 근무했다. 또한 명유 복원에만 10여년 노력했다. 2022년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문화유산보존 학술상’을 받았고 가칠장과 전통 옻칠기법 복원, 조선시대 동유 등의 논문도 발표했다. 글·사진=유명열 기자